건너편에도 올렸지만, 이곳에도 올리게 되네요. 지인분들이랑 같이 둘러봤는데... 작품을 떠나 이렇게 세세하게 한 작품을 분석하고 의미를 찾으려한 비평, 감평은 처음이었습니다.
이게 진짜 비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굳이 가져왔습니다.
아래는 링크를 타고 들어가시는 건 귀찮아 하실까봐 들고온 텍스트입니다. 출처를 위에 두었으니, 괜찮다싶으신 분은 다른 글들도 더 있기에 한 번 들어가셔서 보는 걸 추천드립니다.
3부 작품 해설
용이라도 괜찮아
『드래곤 카르타』에 대한 비평적 접근
최능금
1. "우리의 혁명엔 거대한 힘이 필요해!"1)
문학 작품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자면, 현실 세계에서 완벽하게 분리된 채 하나의 고고한 예술로서 독립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을 창조해내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은 세상의 흐름, 즉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근현대 역사 및 문학에서 가장 뜨겁고 민감했던 주제는, 바로 '인권'이었으리라.
인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역사적으로 흘린 피는 결코 적지 않다. 1688년의 영국 명예혁명, 1776년의 미국 독립 선언이나 1789년의 프랑스 혁명 등등, 현대에 들어선 '천부인권'이라고 부르며 '하늘이 내려준 당연한 것'이라고 평가 받는 인권은 과거엔 존재마저도 부정 당하는 무엇이었다. 물론 이 인권은 아직까지 완전하게 자리 잡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변용되는 주제기도 하다.
『드래곤 카르타』는 '마그나 카르타'2)에서 차용한 제목에서부터 이미 알 수 있듯 인권 신장을 그 기치로 삼고서 출발한 텍스트다. 이 텍스트에서는 하위 계층의 억압받는 인간들을 용으로 치환하여 그 대립구도를 더 자세하고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텍스트는 탈식민주의적이고 인권 신장에 이바지하는 주제를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텍스트의 기묘한 지점에서 이 주제가 반전되고, 이따금 식민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화되기도 했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드래곤 카르타』를 읽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끊임없이 인간들에게 억압받는 용들마저도 저 스스로 다른 용들을 (의식적이거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억압한다는 사실이었다. 계급 구조의 하위 층에 있는 존재들이 어떻게 해서 계급구조를 내면화하는지, 그리고 그를 통해 텍스트 내에서 어떻게 계급구조를 재생산하는지에 집중하면서 『드래곤 카르타』를 다시 읽어보려 한다.
미리 밝혀두지만 이 비평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드래곤 카르타』를 읽는 새로운 관점의 하나일 뿐이다. 이 비평문을 씀에 있어 탈식민주의 비평의 이론과 개념들을 많이 빌려왔지만, 얼마든 다른 비평적 독법으로 읽어낼 수 있고 그에 따라 해석 또한 달라질 수 있음을 유의하며 읽어주기를 바란다.
1) 서시현, 『드래곤 카르타』 1권, 시드노벨, 2016, 165쪽, 이하 쪽수만 표기.
2)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 대헌장이라고도 하며 1215년 6월 15일에 영국의 존 왕이 귀족들의 강요로 인해 서명한 문서로, 국왕의 권리를 문서로 명시한 것이다. 마그나 카르타는 후대의 해석을 통하여 민주주의와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문서로 각인되게 되었다. 위키피디아 '마그나 카르타' 항목 참조.
2. 둘만의, 그러나 모두를 위한.
이 텍스트, 『드래곤 카르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묘사는 바로 용에 대한 타자화othering3)다. 잊어버릴 때쯤 몇 번이고 다시 등장하는 이 묘사들은 텍스트 내부에서 용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바로 종(種)의 차이.
이목이 집중된 것은 뒤집을 수 없는 카스트의 아래쪽에 위치한 종족에게 하대의 시선을 보낸 것뿐. 정말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조금 다른 시선이 있다고 한다면, 일반적으론 소유할 수 없을 만큼 비싼 '짐승'을 보는 시선.
그저 그 정도일 뿐이었다.
(…)
"하등한 것들은 하등한 이유가 있지."
(22쪽)
"일단 용과 인간이 서로 같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야. 둘은 같지 않은데 같다고 생각하니까. 다름을 자각해야지."
(…)
"꽤 불쌍할 거야. 우수한 종을 남기기 위해 근친교배를 시키는 일쯤은 흔하지. 씨받이로 쓰기도 하고 필요 없으면 그냥 죽이기도 하고 말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가축이고 다루는 방법은 폭력이며, 계급은 노예보다 아래지. 감정도 있고 말할 줄도 알지만 그래서 힘들어. 차라리 죽는 게 편해. 나도 한 때 그랬어."
(76~78쪽)
"용은──────── 재산이다!!"
그녀가 용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외쳤다.
"그렇기 때문에! 훔치는 건 범죄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소유주의 허락 없이 조치를 취한다면! 범죄가 된다! 모든! 모든 재산은! 그러하다────────!"
(…)
"용은──────── 물건이다!"
(203~204쪽)
텍스트 내부에서 용은 "짐승"이고 "가축"이며, "계급은 노예보다 아래"고 "재산"이다. 그들에게는 정상적인 인권이 작용하지 않는, 인간의 입장에선 단순한 "물건"이다.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지상 최강의 무력", "오른손의 자연 재해 왼손의 악마", "군사력을 재는 척도"(18쪽), 이런 것들은 인간을 나타내는 묘사가 아니다. 용은 어디까지고 '부족한 대상'이고 '타자'이자 '야만인'이다. 게다가 이런 취급은 용들에게도, 그리고 인간들에게도 너무 "당연했고, 또 익숙"(23쪽)한 것이었다.
이러한 논점은 비서구인들(토착민들)에 대한 서구인들의 제국주의적인 태도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식민주의를 옹호했던 프랑스인 쥘 아르망Jules Harmand의 말을 빌려오자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인종과 문명에는 서열이 있으며, 우리는 우월한 인종과 문명에 속해 있다는 것 그리고 우월성이 권리도 주지만 거기에 따른 엄격한 의무도 준다는 사실을 원칙과 출발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토착민들의 정복을 합법화해 주는 것은 곧 우리의 우월성─단순히 기계적이고 경제적이며 군사적인 우월성뿐만 아니라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확신이다. 우리들의 위엄은 바로 그 특성에 달렸으며, 그것은 곧 다른 인간들을 지도하는 우리의 권리를 강조한다. 물질적인 힘이란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4)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과 용 사이의 서열, 특히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논의는 지극히 인공적이고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그것은 "정복을 합법화해 주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용 또한 "감정도 있고 말할" 수 있으며 "인간급의 지성체"(77쪽)이고, "타인의 아픔을 모른척할 수"(304쪽) 없는, 인간보다도 더 인간다운 존재인 것이다. 소설 내에서 이를 가장 잘 알고 공감하는 캐릭터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선우와 시아다.
주인공의 목표는 곧 텍스트 전반의 목적성이 되곤 한다. 선우와 시아가 "유서 깊은 왕립 성 조지 기룡 학교"에 입학한 이유는 "용의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해서"(74쪽)고 이는 곧 '드래곤 카르타' 그 자체가 된다. 그들은 이 세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108쪽)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 선우와 시아를 가로막는 최대의 장해물은, 바로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인 리오.D.닉슨이다.
"그럼 묻겠어. 선우 군은 용의 권리를 신장하면, 무슨 이익이 있다 생각해?"
(…)
"전세계가 용을 부리는 것에 강력한 동의를 하고 있고, 그것에 막대한 이윤이 있다는 사실도 동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는 거니까."
(…)
"있잖아, 선우 군. 권리나 자유를 언급한다고 그게 정의라고 생각해?"
"이익과 돈보다는."
"역시 선우 군은 이걸 이해 못하네. 바로 그 이익과 돈을 나눠 가지려고 권리와 자유를 만든 건데. 아니면 그것들도 의미가 없어."
(209~212쪽)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리오는 용에 대한 타자화가 인공적이라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인물로 등장한다. "전세계가 용을 부리는 것"이 그저 "동의", 암묵적 합의일 뿐임을 알고 있는 리오는 용을 식민화하여 최대의 "이익"을 챙기려는 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타자화에 대해, 인간과 용의 계급 차이에 대해 누구보다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는 작금의 용의 처우에 대해 "세간이 용을 다루는 방식"(187쪽)이라고 못박고 있으며 "미래에는 좀 가치관이 달라질지도" 모르고 "평등이라는 것이 기본이 되고, 당연한 것이 되"는 것이 곧 "시대는 더 성숙해지"(191쪽)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리오는 지금의 시대가 '덜 성숙한' 시대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리오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는 "권리와 자유"가 어디까지나 "이익과 돈"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를 위해 얼마든 용을 학대하고 억압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악인이다. 리오는 "전세계가 용을 부리는 것"에 아무 저항감 없이 편승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타인(용)의 아픔 따위 보다는 자신의 위신이 더 중요한, 말하자면 이기주의와 식민주의의 총체로서 텍스트 내에서 그려지고 있다.
이 문제는 비단 리오 뿐의 것이 아닌, 전세계의 흐름이며 "세계 의회"의 의지다. 주인공인 선우와 시아는 이 의지에 반反하며 "오직 우리 둘만을 위한", 그러나 세계의 모두를 위한 "혁명"(55쪽)을 실현시키려 하지만, 이곳에서 기묘한 지점이 발생한다. 그들은 "하늘 위에 용이, 용 위에 인간이"(5쪽) 있는 세상을 뒤집으려 발버둥치지만 그런 그들도 어떤 텍스트의 영향력 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바로, "용학"이다.
3) 자신들과는 다른 이들을 모두 온전한 인간 존재가 되기에는 부족한 대상으로 판단하는 것. 타자화는 세계를 '우리'('문명인')와 '그들'('타자들' 또는 '야만인')로 나눈다. 로이스 타이슨, 윤동구 옮김, 「12장 탈식민주의 비평」, 『비평이론의 모든 것』, 앨피북, 2012, 864쪽 참조.
4) Philip D. Curtin, ed., Imperialism (New York : Walker, 1971), pp. 294~95에서 인용.
3. 엥? 용학 그거 완전 유익한 텍스트 아니냐?
『드래곤 카르타』에는 텍스트 안의 텍스트가 총 세 개 나온다. 주인공인 선우가 집필한 소설 「날개꽃」, 그런 주인공이 존경해 마지않는 「셰익스피어」, 그리고 「용학」이 그것이다. 셋 모두 소설 내에서 그리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으며 등장하는 분량만으로 따진다면 「날개꽃」이 압도적이겠지만, 그러나 마지막 것인 「용학」은 짤막짤막한 등장에도 불구하고 아주 기묘한 뉘앙스를 내뿜는다.
칼라일 리즈 아엔델이 집필한 「용학」은 총 4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소설 내에서는 "제3, 제4용학을 보자면, 해상 기룡전의 양상을 꼭 기룡모함 기반의 공중전으로만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118쪽) 정도의 서술밖에 되어있지 않아 그 책의 확실한 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부록인 '오피셜 가이드북'을 살펴보면 얼추 그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데, 아래는 그 발췌다.
칼라일 리즈 아엔델. 그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럽의 명가(名家) 아엔델 가문의 시초로, 조지 1세의 오른팔이었던 그는, 현대 용학의 수준을 끌어올린 인물이다. (…) 해당하는 책들은 각각 용의 기원과 특성, 품종과 사육 방법, 일반적인 구조와 해부적 특성, 관련 의술이 그 내용이다.
(드래곤 카르타 Official Guide Book, 22쪽)
정리하자면 '용학'이란 '용이란 무엇인지 정의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말만 보면 전혀 문제될 부분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초연하고 무정치적인 인문학으로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식민주의의 실천이라는 몹시 추한 역사에 의존"5)할 수도 있듯, 「용학」 또한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는 제재가 될 수 있다. 「용학」이라는 텍스트를 집필한 것은 누구인가? 칼라일 리즈 아엔델이다. 이는 누구인가? 바로 '인간'이다.
"용은 자유라는 개념을 깊이 이해하지 못해. 모두의 자유를 위해서 서로의 자유를 절제해야 한다는 개념도, 욕망에 솔직한 짐승이니까. 그런데 자칫하면 또 위험하기까지 하고, 인류 입장에선 관리가 필요하게 되지. 칼라일 리즈 아엔델이 쓴 제1용학 안 봤냐?"
(78쪽)
용은 자신 스스로 정의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인간에게 그 권리를 고스란히 넘겨주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가 무엇인가. "용은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며 "욕망에 솔직한 짐승"이라는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정의다. 「용학」이라는 텍스트는 겉으로는 '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쓰여진 텍스트고 그를 위해 "용의 기원과 특성, 품종과 사육방법" 따위를 정리한 내용이지만 결국 그 '용학'이 사용되는 의의는 용이 "인류 입장에선 관리가 필요하게 되"는 상황이다.
그 「용학」을 텍스트 내에서 가장 정력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기묘하게도 용인 리비아 메리 J 화이트다. 그녀는 여러모로 용에 대한 타자화를 내면화한 인물로서 등장한다. 리비아는 '용의 권리를 신장하려는' 주인공 선우의 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용학」이 가르친 사상들을 선우에게 전파하려 한다.
그녀는 선우에게 "용과 인간이 서로 같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76쪽)라고 말하며 "종의 차이는 달라"(78쪽)라고 못박는다. 이런 생각은 "야만인들에게 문명을 가져다준다는 유럽인들의 생각, 또 '그들이' 잘못했거나 반항적일 때 '그들이' '우리와는 달리' 힘이나 폭력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처벌해야만 되고 때로는 매를 때리고 때로는 죽여야만 된다는, 그래서 그들은 지배 받아 마땅하다는 서구인들의 상투적인 생각들."6)과 다를 바가 없다.
그 적나라한 예시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젖소"와 "흑인 노예"다. 리비아는 "우유를 얻기 위해 교미를 시"키고 "본래 25년 정도 사는 녀석을 4년밖에 살지 못할 몸"으로 만든 것에 대해 "죄책감"(77쪽)을 가지느냐고 묻는다. 물론, 이 말들이 젖소에 대한 학대의 정당화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흑인 노예에 대한 부분이다.
리비아는 "그 계급은 누가 만들었"는가 선우에게 묻고 선우는 "물론 인간"이라고 대답한다. 리비아는 이에 대해 "그래서 인간이 없앨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 손으로 만든 거니까"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 후 이어진 리비아의 "그렇다면, 용은?"이라는 질문부터 대화는 엇나가기 시작한다. "용과 인간, 그 둘의 차이는 어디 사는 누가 만들었지?"라고 재차 질문하는 리비아는, "누구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도 없앨 수 없"(77쪽)다고 말한다.
그렇게 따지자면, 흑인 또한 누구도 만들지 않았다. 여기서 리비아의 올바른 대답은 "용은?"이 아닌 '용과 인간의 계급은?'이 되었어야 한다. 흑인 노예를 가르는 계급을 인간이 만든 것처럼, 용과 인간을 가르는 계급 또한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서 선봉장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용학」이다.
5) 에드워드 W. 사이드, 김성곤ㆍ정정호 옮김, 『문화와 제국주의』, 창, 2011, 100쪽.
6) 위의 책, 22쪽 참조.
4. 이제, "눈 떠."7)
물론 「용학」은 그 한계 또한 무척 뚜렷한 형태를 지니고 소설 속에 등장한다. 바로 '하프'의 존재다. 인간과 용의 구분과 '차이'를 통해 용을 정의한 「용학」은, 당연하게도 인간과 용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 하프들 앞에선 힘을 잃는다. 왜 하프는 "세계 의회 1급 재판감"인가? 그들은 존재만으로 「용학」의 권위를 흔들고 "인간과 용의 위계질서를 뒤엎을 가능성도 가진 위험물"(135쪽)이기 때문이다.
용과 인간의 중간이라는 것.
그 애매한 경계는 인간으로서 대하기도 힘들고 용으로서 대하기도 힘들다.
그런 주제에 지능은 인간과 같고 몸은 용과 같이 강인하며, 심지어는 인간의 피를 반이나 가졌기에, 인간의 피를 섭취하지 않아도 능력을 쓸 수 있었다.
즉──── 그들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완벽한 이레귤러이자 아웃사이더.
(135쪽)
용은 어디까지나 무기이고 재산이어야 한다. 용은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한 「용학」이고 그러기 위한 차별이고 타자화였다. "인간이 용을 지배해온 이유는 바로 인간의 두뇌"(27쪽)였어야 한다. 인간의 두뇌를 가진 용은 이 자의적이고 인공적인 "인간과 용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릴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주인공인 선우와 시아는 모두 하프였다. 그들은 계급 사회의 틈바구니에 끼어 그 폐단을 일일이 지켜본 인물들이었다. "용이 존재하고 용이 인간에게 사육 당하는 세계"(27쪽)가 얼마나 끔찍한지, "당연히 존재하듯 거기 있어서 중요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권리"(288쪽)가 얼마나 소중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대의를 품고 있고 그래서 그들의 '혁명'은 정의롭다. 그런데, 어라. 왜 이제 와서 시아는, "사람이 되고 싶"(305쪽)은가?
이 텍스트, 『드래곤 카르타』 내에서 가장 기묘한 지점이 나왔다. 바로, '인간'이다. 이제까지의 『드래곤 카르타』는 선우와 시아를 필두로 용의 권리를 되찾고 '성숙한 시대'를 불러오려는, 잘 짜여진 한 편의 탈식민화 텍스트라고 할 수 있었다. 권리를 '되찾는' 길은 멀고 험하지만, 그러나 값지고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주인공들이, "사람이고 싶"(304쪽)은 것은 이상하다. 왜 '용의 권리 신장', '드래곤 카르타'를 불러일으키려고 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인간'이 되고 싶단 말인가?
"선우의 그건 인간을 대하는 태도야."
"오래 지냈으니까."
"무리야, 그건. 선우 군처럼 용의 권리 신장을 말하는 사람도 용을 인간으로서 대하지는 않아."
"어째서 단언하지?"
"권리를 가진다는 것과 인간이 된다는 건 다르기 때문이지. 둘은 같지 않아."
(315쪽)
악역으로 등장하는 리오는 이 부분에서 무척 중요한 발언을 한다. '용이 인간이 되는 것'과 '용 또한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앨리는 "선우 군이 제일 인간"(372쪽)답다면서 선우가 인간이길 바라지만, 그러나 선우는 어찌 됐든 절반은 '용'이다. 흑인이 권리를 찾기 위해 백인이 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용은 권리를 찾기 위해 인간이 될 필요가 없다. 흑인은 흑인으로서 존엄하고, 용은 용으로서 존엄하다.
그러나 『드래곤 카르타』의 세계는 여전히 용의 부르짖음에 침묵하고, 인간은 용을 재산으로 부린다. 리오는 그런 세계의 불합리성을 대변하며 일부러 들고 일어설 필요 없다고, 모른 척하고 받아들이면 편하다고 인간인 우리를 설득한다. 리오의 "눈 감아."(262쪽)는 그런 점에서 차라리 달콤하게 느껴진다. 용의 일은 용의 일일 뿐이다, 인간인 우리는 그저 용의 고통에는 눈 감고 특권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 정말로 그러한가?
당연하지만, 아니다. "타인의 아픔을 모른 척할 수 있는 사람이나, 용들의 아픔을 모른 척할 수 있는 사람이나, 그 근본은 같"(305쪽)다는 시아의 말처럼,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모두가 인간인 것은 아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된다.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 세계에 '인권'을 불러왔다. 선우와 시아의 '혁명'은 끝없이 고통스럽겠지만, 그 가치는 신성하고 정당하다. 그 모습을 보며 이제는 우리가 '눈 뜰' 차례다. 용기 있게, 인간이 아닌 이들에게 인간이 아니어도 된다고, '용이라도 괜찮아'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